한국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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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6-28 12:30 조회3,12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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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당시 동본사 사장 :
한국민주당 (韓國民主黨)
시대 | 현대 |
---|---|
설립 | 1945년 |
성격 | 정당 |
유형 | 단체 |
분야 | 정치·법제/정치 |
요약 1945년에 창당되었던 정당.
<내용>
약칭 한민당이라고 한다. 1945년 9월 16일 서울 천도교기념관에서 발기인 1,600여 명이 모여 창당대회를 가졌다. 이에 참석한 정당·단체는 고려민주당·조선민족당·한국국민당·국민대회준비회·충칭(重慶)임시정부 및 연합군환영준비위원회 등이었다.
이들 정당·단체를 대표하는 민족지도자들은 1945년 9월 4일 서울 종로국민학교에서 대표 82명이 모여 신당발기총회를 가지고 당명을 ‘한국민주당’으로 결정하였으며, 9월 8일에는 한국민주당 발기인 1,000여 명 명의로 조선인민공화국 타도성명서를 발표하고 충칭임시정부 절대지지태도를 밝혔다.
9월 21·22일에는 총회위임에 따라 지역을 안배한 조선민족당·한국국민당 공동비율로 8인의 총무(후일 1인 추가)와 사무국 외 각 부서와 중앙감찰위원 30인을 선출함으로써 당의 체제를 모두 갖추고 송진우(宋鎭禹)를 수석총무로 선출하였다.
정강은 ①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국가 완성을 기함, ② 민주주의 정체수립을 기함, ③ 근로대중의 복리증진을 기함, ④ 민족문화를 앙양하여 세계문화에 공헌함, ⑤ 국제헌장을 준수하여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이었다.
정책은 ① 국민기본생활의 확보, ② 호혜평등의 외교정책 수립, ③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신앙의 자유, ④ 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⑤ 중공업주의의 경제정책 수립, ⑥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⑦ 국방군의 창설 등이었다.
부서와 인선은 영수(領袖:여럿 중의 우두머리)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문창범(文昌範)·서재필(徐載弼)·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중앙집행위원으로 수석총무 송진우, 총무 원세훈(元世勳)·백관수(白寬洙)·서상일(徐相日)·김도연(金度演)·허정(許政)·백남훈(白南薰)·조병옥(趙炳玉)·김동원(金東元), 사무국장 나용균(羅容均), 서무 이병헌(李炳憲), 문서 정광호(鄭光好), 수급(需給) 서기준(徐基俊), 회계 유흥산(劉興山), 외무부에 부장 장덕수(張德秀)와 윤보선(尹潽善)·윤치영(尹致暎)·구자옥(具滋玉)·이활(李活) 외 5인, 조직부에 부장 김약수(金若水)와 김종범(金鍾範)·김재학(金載學)·서용길(徐容吉)·배섭(裵涉) 외 15인, 선전부에 부장 함상훈(咸尙勳)과 백낙준(白樂濬)·이하윤(異河潤)·송남헌(宋南憲)·곽상훈(郭尙勳) 외 5인, 정보부에 부장 박찬희(朴瓚熙)와 고병남(高炳南)·임봉순(任鳳淳)·이길용(李吉用)·김덕은(金德殷) 외 5인, 노동부에 부장 홍성하(洪性夏)와 전진한(錢鎭漢)·변희용(卞熙용)·성낙훈(成樂勳)·나경석(羅景錫) 외 5인, 문교부에 부장 김용무(金用茂)와 양원모(梁元模)·양주동(梁柱東)·오종식(吳宗植)·신도성(愼道晟) 외 5인, 후생부에 부장 이운(李雲)과 유자후(柳子厚)·이원철(李源喆)·김효석(金孝錫)·한진희(韓珍熙) 외 5인, 조사부에 부장 유진희(兪鎭熙)와 이관구(李寬求)·정노식(鄭魯湜)·장발(張勃)·손재형(孫在馨) 외 5인, 연락부에 부장 최윤동(崔允東)과 서상천(徐相天)·김산(金山)·윤택중(尹宅重)·김법린(金法麟)·유석창(劉錫昶) 외 5인, 청년부부장 박명환(朴明煥), 지방부부장 조헌영(趙憲泳), 훈련부부장 서상천, 중앙감찰위원으로는 위원장 김병로(金炳魯)와 서정희(徐廷禧)·현상윤(玄相允)·유억겸(兪億兼)·이기붕(李起鵬) 외 20인이었다.
이 당은 그 창당선언에서도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조선인민공화국의 타도와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우리의 정부로 맞아들이겠다는 것을 당면한 대방침으로 삼았고, 임시정부의 환국 후에도 그것으로 일관하였으나,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는 무렵에는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수립운동에 동조하여 임시정부와 정치노선을 달리하고 대한민국 수립의 주요한 추진세력의 하나가 되었다.
미군정이 실시되자 군정고문 또는 군정청 요직에 다수의 당원이 앉아 미군정의 정책에 협조하여 미국의 대한정책이나 대외정책에 적극 호응하였다. 그러나 창당 초기에 내세웠던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정강·정책과는 거리가 먼 대응을 보였다.
1945년 12월 30일 수석총무 송진우가 한현우(韓賢宇)에게 암살당하고 김성수(金性洙)를 수석총무로 추대하여 당세를 유지해왔으나, 1946년 10월 좌우합작운동의 여파로 원세훈·이순탁(李順鐸)·박명환·김약수 등 창당에 참가하였던 중진간부 100여 명이 이탈하여 한때 큰 혼란에 빠졌다. 이로부터 이 당은 전형적인 보수정당으로서 한국정당사에 그 발자취를 남겼다.
국제연합한국위원단이 그 보고서에서 한국민주당을 보수적 지주정당으로 지적하였듯이, 농지개혁에 있어서 유상매입·유상분배원칙을 고집하여 지주층의 대변자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반민족행위처벌법> 처리과정에서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친일파집단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946년의 좌우합작운동이나 1948년의 남북협상문제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부정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 당은 국제정세를 분석하는 관점이 냉전논리여서 미소 양체제는 근본적으로 공존할 수 없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한반도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공산주의자를 상대로 대화하려는 남북대회는 필요가 없다는 견해를 가졌기 때문에,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운동을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이 당은 분단된 한국정치사에 있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취임 이후 한국야당사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당 간부 가운데에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많았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적 사상의 영향과 반공이념을 통한 한국민주당의 보수적 정치이념은 오늘날에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이 당은 야당으로서의 활동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1949년 1월 27일 성명을 발표하고, 대한국민당의 신익희(申翼熙) 세력과 대동청년단의 지청천(池靑天) 세력을 규합하여 새로이 출발할 것을 다짐하고, 그 해 2월 10일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으로 새출발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