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하의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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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의 생애/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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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의 약력

연도 나이 행적
1890년 5월 8일(음) 부친 송훈(宋壎), 모친 양(梁)씨의 4남 4녀중 4남으로 출생하다. 아명(兒名)은 옥윤(玉潤) 또는 금가지.
1904년 15세 네살때부터 약 10년간 의병대장 기삼연(奇參衍), 김직부(金直夫)선생 등으로부터
한학(漢學) 수학 후, 15세에 유(柳)씨(본관 고흥)와 결혼하다.
1906년 17세
한학공부를 마치고, 신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창평(昌平)의 영학숙(英學塾)에 입학하여 이곳에서 평생의 동지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와 만나다.
<1925년경 일본 동경에서 仁村(우)과 함께>
1908년 19세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 및 킨죠우중학교(錦城中學校)를 거쳐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에 입학하다.
1910년 21세 조국의 강제합병에 충격을 받아 자결할 생각으로 학업을 포기한 채 귀국하다.
1915년 26세 부친의 권유로 다시 도일(渡日), 1911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로 전과(轉科) 후 졸업하다. 동경 유학기간중 유학생 친목회 총무 및 잡지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인을 역임하다.
1916년 27세 귀국 후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학감(學監)에 이어 교장에 취임하다.
1917년 28세 단군, 세종대왕, 이충무공 세 분을 함께 받드는 삼성사(三聖祠)건립기성회를 조직하고 남산에 이를 건립할 것을 추진하자 이를 간파한 총독부의 조선신궁(朝鮮神宮) 건립으로 좌절되다.
1918년 29세
중앙학교를 중심으로 학생동원을 조직하고 국내외 각계 지도자와 제휴를 모색하면서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김성수(金性洙), 현상윤(玄相允), 최남선(崔南善), 최린(崔麟) 등과 조국독립운동을 획책하다.

<중앙학교 숙직실과 3.1독립운동책원지 표석>
1919년 30세 3.1독립운동을 획책한 관계로 48인중 1인으로 중앙학교에서 피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내란죄, 보안법 등의 죄목으로 1년 반 동안 혹독한 고문과 옥고를 치르다.
1920년 31세
스코필드 박사(Dr. Frank W. Schofield:한국명 석호필)가 일제로부터 추방되기 직전에 재회를 기약하며 ‘내친구 송진우’라고 쓴 성경책을 고하에게 선물하다.(독립을 위하여 계속 투쟁하자는 뜻이 담김)

<스코필드 박사가 선물로 준 성경책>
1921년 32세 1920년에 창간된 동아일보 제3대 사장(주식회사 동아일보사 초대사장)에 취임하다.
1922년 33세 - 동아일보 사설 “민립대학의 필요를 제창하노라”를 필두로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앞장서다.
- 3.1운동으로 뜨거워진 교육열과 향학열을 수용하여 민족교육운동으로 발전시키다.
- 민족의 자부심을 높이고 과학진흥에 관한 관심을 제고하기 위하여 일본에 체류중인 안창남 비행사 모국방문비행을 주최하다.
1923년 34세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물산장려운동(物産獎勵運動)을 적극 추진했고, 재외동포위문회와 시국강연회를 순회 주최하였으며, 전국 우량어린이 선발대회 및 여자정구대회 등의 사업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작하다. 또한 동경 대지진 특별취재에 이상협(李相協) 기자를 특파하고 이재동포 구호운동을 전개하다.
1924년 35세 조선총독부가 규합하고 있는 수많은 친일조직들에 대하여 동아일보는 「소위 각파 유지연맹에 대하여」라는 사설로 이를 크게 꾸짖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사설(社說)에 항의하는 친일단체 대표 박춘금(朴春琴)의 권총 협박을 당하다. 이 후 총독부의 압력으로 동아일보 사장직을 사임하고 고문에 취임하다.
1925년 36세 하와이 제1회 범태평양민족회의에 신흥우(申興雨), 유억겸(兪億兼), 서재필(徐載弼), 김활란(金活蘭) 등과 함께 참석하다. 그곳에서 이승만(李承晩)을 처음 만나 그의 망명제의를 사절하고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의를 다지다. 귀국 후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世界大勢와 朝鮮의 將來)라는 명논설을 연 12회 동아일보에 게재하여 선각적 시각으로 조선의 장래에 대한 탁견을 피력하다.
1926년 37세
모스크바 국제농민회본부에서 조선농민에게 보낸 3.1운동 7주년 기념사 「국제농민본부로부터 조선농민에게」 제하의 기념사를 게재하였다 하여 주필로서 6개월 실형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옥고를 치루고, 동아일보는 제2차 무기정간을 당하다.
<1926년. 京城覆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6월의 선고를 받음>
1927년 38세 동아일보 제6대 사장에 다시 취임하다.
1928년 39세 - 문맹퇴치운동을 주도하였으나 총독부의 금지로 중단하다.
- 장제스(蔣介石) 국민정부 주석 취임식에 주요한(朱耀翰) 기자를 남경에 특파하다.
1929년 40세
-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의 특별기고,“조선은 아시아의 빛나는 등불” 이라는 시를 받아 동아일보에 게재하여 3.1운동 10주년을 기리다.

- 일본 교토(京都)에서 열린 제3회 범태평양민족회의에 윤치호(尹致昊), 유억겸(兪億兼), 김양수(金良洙), 백관수(白寬洙), 김활란(金活蘭)과 함께 참석하다.
<왼쪽부터 백관수, 송진우, 윤치호, 유억겸, 김활란>
1930년 41세 동아마라톤대회를 창설하다. 이어 동아일보 창간 10주년 기념호에 미국 네이션지 주필의 축사게재로 제3차 무기정간을 당하다.
1931년 42세 - 제2의 애국가로 불렸던 「조선의 노래」를 제정, 나라가 없어 국가를 제정할 길이 없는 민족의 노래로서 민족정신고취를 위해 음악가 현제명에게 작곡하게 하다 - 충남 아산군 충무공 이순신 묘소 위토가 채무에 몰려 경매에 붙여지게 되자 고하는 동아일보 사설 「민족의 수치, 채무에 시달리는 충무공 묘소」라는 제하의 사설을 게재, 민족의 성웅 충무공 묘소 위토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애국심의 냉각과 민족적 자부심의 마비를 통탄하다. 이로 인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성금이 답지, 토지문서를 되찾고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결성하여 제2단계 사업으로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 방화산에 현충사 건립공사를 착수하다.

- 임진왜란의 영웅인 권율(權慄) 장군의 행주산성 기공사를 중수하다.

- 이해부터 여름방학마다 브·나르도운동이라는 국민계몽운동을 4년간 계속하다 총독부의 간섭으로 중단하다.

- 만보산사건이 발발하자 이것이 일본의 한중이간(韓中離間)을 위한 간계임을 즉각 간파, 사설로 한중 양국민간에 보복중지를 호소하고 위문금 5천원을 서울주재 중국영사관에 보내 화교를 위문하는 동시에 설의식, 서범석 기자를 특파하여 취재하게 하고 비밀리에 국제연맹조사단에게 진실을 알리다. 후일 장제스가 감사의 은패를 보내오다.

- 민족의 대각성, 대단결, 대활동의 계몽을 위한 목표로 월간 “신동아(新東亞)”를 창간하다.



<브·나로드운동 포스터>

<장제스의 감사 은패>
1932년 43세 - 완공된 아산의 현충사에 후손이 보관중이던 검, 금대, 난중일기, 칙지 등 이충무공의 유물을 안치하다. 동아일보 전속 삽화가 청전 이상범에게 충무공의 영정을 그릴 것을 지시하여 그해 6월 5일 새 사당에 영정 봉안식을 거행하다. 이날 수만의 백의인파(白衣人波)가 주변의 산야를 뒤덮었고 겨레의 잔치가 성황을 이루어 온겨레의 피를 끓게 하다.

- 단군성적(檀君聖蹟)을 조사하기 위하여 현진건(玄鎭健) 기자를 전국에 순례하도록 특파하다.
1933년 44세 - 6년간의 준비 끝에 조선어학회의 새 맞춤법을 채택하고 동아일보에 새 활자를 도입, 한글의 보존과 발전에 기여하다.

- 조선여성의 권익신장을 도모하기 위해 월간 “신가정”(新家庭) (현재 여성동아의 전신)을 창간하다.
1934년 45세 - 현진건 기자의 조사를 토대로 평남 강동읍 대박산 아래의 단군릉 수축기금을 모금하다. 모금된 5백원을 단군릉 수축기성회에 전달, 허물어진 담벽 등을 보수하고 이의 유지를 위해 열성을 다하다.

- 사설을 통하여 평양 숭실전문학교 맥큔학장의 신사참배거부를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 옹호하다.
1936년 47세
독일 「베를린」 제10회 하계올림픽대회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가슴에 단 일장기를 삭제하여 보도할 것을 이길용(李吉用) 체육기자, 백운선(白雲善) 사진기자, 이상범(李象範) 삽화가, 강대석(姜大奭) 제판기자 등에게 지시함으로써 발생한 소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은 제4차 무기정간, 이어 신동아 및 신가정의 폐간과 함께 동아일보 사장직을 강제로 사임하다.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진>
1939년 50세 총독부로부터 시국에 부응하여 동아일보가 자진 폐간할 것을 강요받자, 이를 거절하다.
1940년 51세 - 동아일보 폐간압력에 맞서 동경에 건너가 일본정계 지도자들과 폐간의 부당성을 역설하고 협의하였으나 귀국도중 부산에서 일경에게 피검, 종로서에 구금되고, 신문은 강제 폐간되다.

- 강제 폐간 후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대표청산위원에 선임되어 청산사무를 지휘하다.
1943년 54세 동아일보사 청산위원회 해체 후 4차의 무기정간과 1,000여회의 압수, 삭제 처분의 항일 기록을 가진 동아일보의 명맥을 유지하고 재기의 날을 기약하기 위해 주식회사 동본사(東本社)를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하다.
1944년 55세 설의식, 장철수 등을 통하여 카이로선언의 내용을 청취하고, 국제 동향을 상세히 파악하다. 특히 얄타회담과 포츠담선언을 심도있게 파악하다.
1945년 56세 - 해방직전 전후 4차에 걸쳐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권인수교섭을 받았으나 불응하다. 해방 후 여운형(呂運亨)측 건준(建準)의 협조요청을 거절하고 정당 시기상조론과 연합군 환영의 필요를 내세워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김창숙(金昌淑)을 고문으로, 서상일(徐相日), 장택상(張澤相), 김준연(金俊淵) 등을 임원으로 하여 국민대회준비회(國民大會準備會)를 결성하고 그 위원장에 선임되다. 그러나 건준(인공)의 여운형과 박헌영의 남로당 등 공산계열 정당들의 창당과 정치정세의 변화에 따른 우려로 민족진영의 4당 합당에 따라 결성된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당수)로 추대되자 이를 수락하고 이어 중간(重刊)된 동아일보의 제8대 사장에 취임하다.
※ 여운형과 박헌영은 고하가 동아일보 사장 재임시 사원으로서 여운형은 상해통신원, 박헌영은 판매부, 지방기자로 근무하다.

- 고하(古下)는 해방정국에서 가장 중요한 이 두 개의 조직을 이끌고 환국지사후원회(還國志士後援會)를 결성, 풍찬노숙하고 환국한 애국지사들을 돕기 위해 재계 등 국민적 모금운동을 펼쳐 국내 정치기반이 전혀 없는 이승만(李承晩)에게는 돈암장(이화장)을, 김구(金九)에게는 서대문경교장을 마련해 드리다. 상해임시정부의 법통(法統) 지지, 이승만과 국민총동원 방법논의, 또한 「하지」미군정사령관과 「아놀드」군정장관에게 반탁시위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12월 28일, 29일은 임정요원들과의 회의에서 미군정청과는 충돌을 피하고 국민운동으로 반탁을 관철해야 한다는 신중론을 피력하는 반탁 방법문제를 논의하는 등, 나라세우기에 진력하다가 귀가, 12월 30일 오전 6시 15분 서울 종로구 원서동 74 자택에서 한현우, 유근배 등 자객 6명의 저격을 받고 서거하다.


<1945년 12월 피격 며칠 전. 국민대회준비회
(현 동아일보 건물) 사무실을 나서는 古下>
















古下 宋鎭禹先生 一代記

 

(서울 광진구 능동 서울어린이대공원 동상 뒤 병풍석에 각자(刻字)되어 있음)

 

  

1910년 나라를 잃은 이래 日帝의 압박에 신음하던 35년간 國內 敵陣 속에서 이 겨레를 이끌고 앞장서서 싸우시던 代表的 民族指導者이며 光復 전후 공산당의 정체를 미리 看破하고 그들의 흉계를 봉쇄하여 오늘날 民主的 삶의 기초를 닦아주신 古下 宋鎭禹선생, 獨立運動家요 言論人이요 政治家요 敎育家로서 智勇이 兼全했던 그 위대한 一生(1890-1945 潭陽出生)은 겨레를 위한 獨立爭取의 血鬪이었으며 投獄과 迫害와 유혹과 모함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선생은 젊은 시절에 孫文이 제창한 三民主義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民族主義로 무장하고 겨레의 자유와 권리를 伸長하기 위하여 民主主義를 信奉하였으며 백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民生主義를 追求하였고 이와 동시에 우리 민족의 문화적 독립을 위한 民文主義를 救國과 獨立의 思想的 基礎로 삼아 투쟁하였습니다. 

 

선생은 어려서 漢學을 수학하고 日本 明治大學 法學部를 졸업한 뒤 1916년 中央學校 교장으로 취임하여 人材養成에 힘쓰고 널리 民族精神과 獨立思想을 일깨우면서 기회를 엿보던 중 1차대전 말기에 民族自決主義가 제창됨을 계기로 일대 민족독립운동을 계획하였읍니다. 이때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던 天道敎, 基督敎, 佛敎 등 各宗團과 학생 기타 국내세력간의 提携를 이룩하고 日本 中國 및 歐美에서 활동하던 志士들을 연결하여 民族大同의 기틀을 마련하고 三·一운동을 일으킴으로써 亡國 十年만에 回天大業의 민족항쟁을 主導하였습니다. 선생은 이 운동을 계속 확대하고 뒷일을 수습하기 위하여 獨立宣言書에 署名하지 아니하였으나 곧 구속되어 獄苦를 겪었습니다.

 

出獄후에는 仁村金性洙 선생과 함께 東亞日報를 이끌고 이를 항일독립운동의 발판으로 삼아 이 민족에게 씌워진 멍에를 가로멘 채 獨立을 위한 줄기찬 항쟁을 先導하였습니다. 己未獨立宣言 이후 7년만에 純宗이 돌아가심을 계기로 六·十만세운동의 도화선을 만들었고 그로부터 10년후에 다시 베르린 올림픽에서 세계를 제패한 마라톤 선수 孫基禎의 가슴에 달린 日章旗를 지운 채 사진을 게재함으로써 日章旗抹消事件을 일으킨 것 등은 끊임없는 독립투쟁의 一例에 불과합니다. 뿐만 아니라 日帝가 愚民政策을 쓰려 하자 선생은 여러 해 동안 전국을 순회하며 계몽강연을 하고 民立大學建立의 추진, 文盲退治運動의 전개, 여성지위 向上, 班常打破, 지방색 解消, 스포츠 普及, 유능한 技能人 및 優良어린이를 찾아서 표창하는 등 우수민족역량의 배양에 힘썼으며 日帝가 백성의 재산을 뺏고 民族資本의 集成을 방해하자 선생은 物産장려운동을 일으키고 당시 범람했던 日製 물건의 배척운동을 추진하며 貧困打破와 農工竝行 등 국력배양에 헌신적으로 노력하였습니다. 日帝가 文化抹殺政策으로 言語, 文化 및 유적 등을 없애려 하자 선생은 새로 연구된 한글맞춤법을 널리 보급하고 新文學을 장려하며 「朝鮮의 노래」 등을 제정하여 한글의 보존과 발전에 주력함으로써 文化民族의 긍지를 높이는 한편 檀君, 世宗大王 및 忠武公을 모시는 三聖祠의 建立運動을 펴고 李忠武公유적보존운동을 일으켜 牙山 顯忠祠와 閑山島 戰蹟을 重修하며 權慄장군의 紀功祠를 重建하는 등 민족의 얼을 고취하였습니다. 또한 日帝가 民族抹殺政策으로 移民 混血 및 創氏를 강요할 기미를 보이자 선생은 이에 결연히 대항하고 南北만주 및 中國에서 활약하는 獨立軍에게는 군자금을, 외지에 흩어진 離散同胞들에게는 위문금을 모아 보내고 愛國烈士들의 유가족을 부양하거나 獄苦를 치르는 동지들을 자상하게 뒷바라지 하기가 이루 셀 수 없었습니다. 특히 日帝가 대륙침공을 위한 韓中離間策으로 萬寶山事件을 일으켰을 때 선생은 저들의 底意를 미리 알아채고 그 허위조작임을 폭로하여  國內 華僑와 수십만 在滿洲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전케 했고, 이를 계기로 韓中 兩民族의 友好와 臨時政府의 유지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뒷날 한국독립에 도움을 주었읍니다. 선생은 밖으로는 하와이 등지에서 열린 汎太平洋民族會議에 대표로 참석하여 각국의 유력인사와 끊임없이 접촉하고 국제친선에 힘쓰는 동시에 안으로는 미국 카나다 등에서 온 선교사들의 종교 및 교육사업에 대한 日帝의 가혹한 탄압에 맞서서 神社參拜 지시에 불응하고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여 歐美諸國과의 友誼를 두텁게 하였읍니다. 선생의 일생은 자나깨나 民族保全과 獨立達成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내외동포들은 선생이 이끄는 東亞日報를 形態 없는 政府로 믿고 의지했으며 선생을 우리 민족의 등불로 믿고 따랐습니다. 

 

패망을 앞둔 日帝가 제一차로 선생에게 여러번 통치권을 맡기려 하자 이를 거절한 다음 光復을 맞자 국내외 국민의 역량을 총집결하기 위하여 國民大會準備會를 조직하여 민족진영의 모체로 삼았고 海外亡命人士들이 귀국하자 還國志士後援會를 결성하여 힘껏 뒷바라지 하였습니다. 또한 日帝時代 초기부터 국내에 침투해 온 공산주의의 實相을 간파하고 꾸준히 젊은이들을 올바로 啓導해 온 선생은 해방후의 혼란을 틈 타 공산당의 赤化野慾이 노골화되자 汎民族陣營을 통합하여 韓國民主黨을 창당하고 그 대표로서 首席總務에 취임하였으며 信託統治案이 전해지자 반탁운동을 위한 대책 강구에 분망하던 중 1945년 12월 30일 반민족적 무리의 흉탄에 그 高邁한 일생을 마쳤습니다. 

 

선생은 제1회 汎太平洋民族代表者會議에 참석한 후 歸國船上에서 집필하신 世界大勢와 朝鮮의 將來라는 名論說에서 당시 韓半島의 국제정치적 운명을 정확히 예언한 바 있습니다. 선생은 歷史의 進運에 대한 예리한 판단력과 탁월한 識見을 갖춘 분으로서 民族不滅·日帝必亡·獨立必至의 확고한 신념, 굳은 지조, 웅대한 포부와 經世方略, 비범한 통솔력, 불굴의 鬪志와 넘치는 覇氣로 日本帝國主義 및 共産主義와 싸우며 암흑시기에 국내에 우뚝서서 이 민족을 수호한 獨也靑靑의 기상이었습니다. 어느 史家는 말하기를 임진왜란 때에는 無力하나마 政府가 있었지만 日帝침략중에는 그나마도 없는 때에 선생이 이 겨레에게 희망과 신념을 심어주고 이끌어 왔으니 그 공적은 忠武公 이후의 偉業이라고 찬양한 바 있습니다.

 

선생은 나라를 근심하되 자기 한몸이나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였고 남에게는 항상 공경하는 자세로 마음껏 즐겁게 대하였으나 다른 한편 衆人을 압도하는 위엄이 있었으며 중요한 결정을 내릴 경우에는 말없이 深思熟考한 뒤에 자기의 주장을 당당히 내세웠습니다. 인품이 호탕하고 개방적일 뿐만 아니라 感興이 일면 붓을 들어 능란한 솜씨로 漢詩를 짓곤 하였습니다. 선생이 하와이에 가시는 船上에서 얻은 詩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南北東西不見洲 (사방을 바라보아도 뭍은 안보이는데)  

連天水色閑行舟 (하늘과 맞닿은 물빛 속에 뱃길만 한가롭네) 

安將眼下太平洋 (언젠가 눈 아래 태평양 물로)

滌盡人間萬古愁 (만고에 쌓인 인간의 근심을 씻어내 볼까)

 

  

이제 선생이 가신지 38년만에 그 거룩한 抗日獨立과 愛國反共의 遺志를 후세에 전하여 길이 民族의 師表로 삼고자 이곳에 뜻을 모아 동상을 세웁니다. 

 

 

1983년 7월 

  

고하 송진우선생동상건립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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