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거부 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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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9-13 17:02 조회2,40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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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당시 동아일보 사장 :
1934년에 일어난 저항(抵抗) 운동의 하나가, 평양(平壤) 숭실(崇實)전문학교의 신사불참배(神社不參拜) 운동이었다. 심지어 민중 계몽운동까지도 탄압을 자행하던 일제는, 급기야 교육계와 종교계에까지 간섭을 일삼게 된 것이다.
이때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참다못해 들고일어나서 정면으로 거부한 곳이 기독교 도시 평양이었고, 미국 선교사 윤산온(尹山溫 Dr. George Shannon McCune)이 교장으로 있는 숭실전문학교였다. 그리고 그 저항 운동을 옹호하고 나선 것이 고하였다.
숭실전문학교가 신사 불참배의 방침으로 일관하자, 총독부와 평안남도 당국은 숭실전문의 존폐 문제를 들고 나왔다. 윤산온은 일소에 붙였다. 그러나 교수들간에 이견(異見)이 생겨 교수진도 신사 참배와 신사 불참배의 두파로 나누어졌다. 일부 신사 참배를 주장하는 교수측에서는 학생을 선동하여 동맹휴학(同盟休學)을 일으켰다. 그래도 윤산온은 초지를 굽히지 아니하였다. 학교를 폐쇄당해도 좋고, 또한 동맹 휴학을 하고 학생이 등교하지 않으면 문을 닫겠다는 것이었다.
윤산온의 강경한 주장에 일부에서는 실정을 모르는 처사라고 비난하는 편도 생겼다. 개인 뿐 아니라 단체가 움직이고, 이에 일부 신문이 가담을 하여 동맹휴학에 동조하는 측도 생겼다.
“종교를 위해서 교육을 희생시킬 수는 없소”
이 주장에 대다수의 의견이 기울기 시작했다. 일부 여론과 신문, 식자층이 윤산온을 비난할 때, 고하는 분연히 일어나 신문 사설을 써서 인간 본래의 권리인 신앙의 자유를 부르짖고 사회면을 통해서 경거(輕擧)를 질책했다. 윤산온은 암흑에서 광명을 찾은 것 같이 기뻐했다.
고하가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서도 윤산온을 옹호하고 일어선 것은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빌어서 은연중 민족 정신을 앙양해 보자는 속셈이 담겨있었다. 고하의 생각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종교도 종교지만 일제의 쇠사슬에서 신음하는 이 민족에게 많은 재산과 힘을 들여 교육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외국 선교사들에게 민족을 대표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자는 데도 있었다.
고하의 판단은 민족을 위해서는 언제나 정확하고 정당했다. 그러나 정당함이 진리에 통하지 않는 시대에 너무 정당했기 때문에 모두들 놀랐다.
‘동아일보는 폐간된다. 송진우는 구금된다’
항간에는 동아일보의 폐간과 고하의 구금설이 떠돌았다.
‘전체주의자(全體主義者)와 미친개는 통한다’
하고, 고하는 전체주의자는 미친개처럼 언제 어디서 물고 덤빌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부르짖는 고하와 동아일보는 구금과 폐간을 면했다. 그것은 단지 구금하고 폐간시킬 정당한 이유를 못찾은 데서였다.
고하의 용단과 장거(壯擧)는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고하 한 사람과 동아일보가 신사참배에 항거하여, 이를 근절시키지는 못했지만 일부 일제에 아부하던 학자와 유지들의 언동을 주춤하게 했고, 종교가 무엇인지 모르고 떠들던 학생들의 머리를 식히게 했다. 또한 뜻있는 이로 하여금 이 시대에 가장 올바르게 사는 길을 제시하기도 했다.
뒷날 이 사건은 우리 민족의 광복 운동에 많은 공헌을 했다. 일제는 끝내 윤산온을 굴복시키지 못했으며, 더욱이 외국인인 그를 체포할 수도 없었다. 정세는 점차 악화해서 일본 군국주의는 드디어 외국인 선교사 추방을 결정하고 모든 외국인에 대해서 발악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인간의 정상을 벗어난 탈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윤산온을 비롯한 추방당한 선교사들은 고국에 돌아가서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 독립을 위하여 열변을 토했고 제2차 대전 중에는 자진 종군하여 단파방송을 통하여 한민족의 독립이 가까워옴을 알렸던 것이다.
출처:고하송진우선생전기 '독립을 향한 집념',동아일보사,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