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참남 비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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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6-28 12:29 조회3,11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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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자부심을 높이고 과학진흥에 관한 관심을 제고하기 위하여 일본에 체류중인 안창남 비행사 모국방문비행을 주최하다. 당시 이 행사 이후 “하늘에는 안창남, 땅에는 엄복동 (우리나라 최초의 자전거 선수)” 이라는 유행어가 계속 되었다.
안창남
외국어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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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昌男(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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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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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 19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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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휘문고보(徵文高普: 휘문고교 전신) 시절 미국인 비행사 아트 스미스의 비행쇼를 관람한 후 비행기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안창남은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191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자동차학교, 도쿄 비행기계제작소, 오쿠리 비행학교를 거치면서 비행기 제조법과 조종술을 배웠다. 졸업 후 오쿠리 비행학교의 교수가 되기도 했다.
1921년 5월 일본 항공국에서 최초로 실시한 비행사 시험에서 1등으로 합격했다. 이어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주최한 도쿄ㆍ오사카 간 비행에 성공하면서 도쿄ㆍ오사카의 우편 비행기 조종사가 됐다. 이로 인해 국내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이 밖에도 여러 다른 비행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하여 '안창남(安昌男)'이라는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1922년 12월 10일에는 <동아일보>가 모금을 주도하여 성사된 '안창남의 고국방문 비행'으로 온 국민의 대환영을 받았다. 그는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금강호(金剛號)를 타고 15분간 곡예비행을 하고, 이틀 동안 남대문, 독립문, 서대문 감옥, 인왕산 등 서울 상공을 왕복 비행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그가 여의도 상공 곡예비행을 무사히 마친 후부터 퍼지기 시작한 이른바 <안창남 비행기>로 알려진 노래가 있다. "떳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보니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노랫말로, 민요 청춘가를 개사한 것이다. 이은상(李殷相) 작사의 <사우(思友)>와 함께 한국인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애창곡 중 하나로 유명했다.
당시 비행기는 20세기 과학기술의 핵심체로서, 안창남의 비행 모습은 꺾여진 민족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웠으며 동시에 과학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였다. 안창남은 자신의 비행기술로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하여 민족운동가 이상재 선생의 소개로 1924년 상하이로 망명, 베이징의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는 한편 중군 군벌 염석산의 휘하에서 타이위안비행학교 교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최양옥, 김정련, 이용화 등과 함께 '대한독립공명단'에 가입, 한국인 비행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1929년 비행학교 설립을 위해 국내에 파견된 공명단원들에게 독립운동 자금 600원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1930년 4월 항공교관으로 비행훈련 교육 중 추락사했다.
- 출처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박문각, 제공처의 다른 책보기표제어 전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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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안창남 (시사상식사전, 박문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