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맞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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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6-28 12:30 조회3,53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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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월 당시 동아일보 주필:
6년간의 준비 끝에 조선어학회의 새 맞춤법을 채택하고 동아일보에 새 활자를 도입, 한글의 보존과 발전에 기여하다.
한글맞춤법
동의어 맞춤법, 철자법
유형 | 개념용어 |
---|---|
분야 | 언어/언어·문자 |
요약 문자체계로서의 한글 자모를 확립하고 그것으로써 국어를 표기하는 규범.
<내용>
따라서, 한글맞춤법이라 할 때에는 한자(漢字)를 비롯한 외래문자체계에 의한 표기규범은 해당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한글맞춤법은 국어정서법(國語正書法)과는 구별된다.
국어정서법은 국어를 올바르게 표기하는 규범이므로 한글로만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국어정서법의 범위가 한글맞춤법의 범위보다 넓게 되기 때문이다.
한글맞춤법이라는 용어가 생기기 이전에는 한자어로서 언문철자법(諺文綴字法) 또는 조선문철자법(朝鮮文綴字法)이라고도 불렀기에 ‘맞춤법’은 ‘철자법’의 신조어가 되는 셈이었다.
‘철자법’이라는 용어는 개화기에는 문자의 음절구성법을 뜻하는 것이었기에 ‘맞춤법’보다는 지극히 좁은 뜻으로 쓰였던 것이다.
한글맞춤법의 제정은 크게 다섯 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는 훈민정음 단계, 둘째는 국문연구의정안 단계, 셋째는 언문철자법 단계, 넷째는 한글맞춤법통일안 단계, 다섯째는 한글맞춤법 단계 등이 그것인데, 첫째 단계로부터 부분적인 개정을 거쳐 현재의 다섯째 단계에 와 있는 것이다.
‘훈민정음’에서 제시된 음소적 표기를 바탕으로 하여 형태음소적 표기 방향으로 부분적인 개정이 이어졌던 것이다.
(1) 훈민정음단계
한글맞춤법의 역사는 한글, 즉 훈민정음의 창제에서 비롯되었다. 훈민정음이라는 문자체계를 창제하고서 그 문자체계에 의하여 국어를 표기하기 위해서는 맞춤법이 있어야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맞춤법은 ≪훈민정음≫이라는 책에 나타나 있다.
첫째는 음절이론에 따른 ‘초중종삼성 합이성자(初中終三聲 合而成字)’라는 규정과 같이 초·중·종 삼성을 하나의 음절로 묶어 표기하는 철자의 규정인데, 이때에 초성은 중성의 위쪽이나 왼쪽에 있고, 중성은 둥근 것과 가로된 것의 경우에는 초성의 아래에 있으나 세로된 것의 경우에는 초성의 오른쪽에 있으며, 종성은 초성·중성의 아래에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병서(竝書)의 경우에는 ‘, 쏘다, , , ’ 등과 같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란히 쓰도록 하였다. 만일 한글전용이 아니라 한문을 언문과 섞어 쓰는 국한문혼용의 경우에는 ‘孔子ㅣ魯ㅅ사’과 같이 한자의 음에 따라 중성이나 종성으로 기울 수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한문과 국문이라는 이질적인 문자체계를 함께 사용하는 경우이기 때문에 초성·중성·종성을 모아 써서 음절단위로 표기하는 규정에 결국 예외가 되었던 셈이다.
≪훈민정음≫의 두번째 맞춤법규정은 종성표기에 관한 것이다. 초성과 중성의 표기에 대해서는 더이상의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나 종성의 표기에 대해서는 이른바 8종성법을 제시하였다.
즉, ‘종성부용초성(終聲復用初聲)’이라 하여 종성 글자를 따로 만들지 않고 초성 글자를 다시 쓰되 ‘ㄱ ㄷ ㄴ ㅂ ㅁ ㅅ ㄹ 八字可足用也’라고 규정하였다.
예컨대, ‘○곶(梨花), ○의갗(狐皮)’에서의 종성 ‘ㅅ ㅈ ㅿ ㅊ’을 ‘ㅅ’으로 통용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본형대로만 적는 것이 아니고 종성 위치에서 실현되는 8종성만을 그 초성 글자로 적는 방식인데, 결국 음소적 표기를 규정한 맞춤법인 것이다.
요컨대, ≪훈민정음≫에서 규정한 맞춤법은 음소와 문자를 1대 1로 대응시켜 적는 표음적 표기로서 기본형을 무시하고 환경에 따라 실현된 음소대로 표기하는 음소적 표기에 초점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훈민정음≫에 제시된 음소적 표기로서의 맞춤법 규정은 당시의 대부분의 문헌들에 실제로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다. 다만, 한자음의 경우 ‘呪○ㅣ, 死와’ 등에서와 같이 표기상으로는 종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음으로 끝난 경우와 같이 표기된 경우도 없지는 않다.
≪훈민정음≫ 자체에는 규정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15, 16세기의 맞춤법에서는 어휘형태소와 문법형태소와의 경계에서 어휘형태소의 끝자음을 모음으로 시작되는 문법형태소들 앞에서 연철(連綴)을 허용함을 원칙으로 하였다.
예컨대, ‘일후미(名), 알(前), 브트샤(依), 업스니라(無)’ 등과 같은 경우는 물론이고, 나아가 ‘사교미(釋)’등의 경우와 같이 체언형과 조사와의 경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형태소경계를 표기상에 일체 반영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역시 음소적 표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다만, 한자로 표기된 한자어의 경우에는 그 한자어 뒤에 어떠한 문법형태소가 오더라도 ‘法법에, 法법身신이, 德득을’ 등과 같은 연철표기는 허용하지 않았고, ‘놀애, 몰애’라든지, ‘와, 블와’ 또는 ‘놀(노+), 로(+로)’라든지, ‘어輞, 오, 오져’라든지, ‘달아·달옴’, ‘길오―·길우―, 달애―, 알외―’ 및 ‘달이(다+이), 골오(고+오)’ 등과 같은 경우에도 연철을 허용하지 않고 분철을 지켰던 것이다.
이는 국한문혼용체라는 이원적 문자체계의 성격, 그리고 형태소 내부에서 또는 형태소 경계에서 어떤 음소가 탈락되어 있음을 의식한 결과이기에 일반적인 연철환경과는 다른 경우이다.
8종성 이외에 때로 종성으로 쓰인 초성은 ‘ㅿ’과 ‘ㆆ’이 있다. ‘ㅿ’은 음절말의 유성적 환경에서 ‘○이, 아, ○니, ○니’ 등과 같이 쓰이기도 하였으나 이는 ‘ㅅ’과 수의적으로 표기된 경우이고, ‘ㆆ’은 ≪동국정운≫의 이영보래(以影補來) 즉 영모(影母) ‘ㆆ’으로써 래모(來母) ‘ㄹ’을 보충하는 규정을 따라 ‘디니라’ 등과 같이 쓰였던 경우인데, 곧 ‘홀 디니라, 홀 띠니라’등과 같이 표기되어 다시금 당시 맞춤법의 8종성에 한정되게 되었다.
이러한 연철 및 8종성의 예외적인 문헌으로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이 있다. 말하자면 이 두 문헌에는 음소적 표기가 아닌 형태음소적 표기가 때로 나타난다. 예컨대, ‘곶, 고’과 같이 표기되고 ‘곳, 고’과 같이는 표기하지 않은 예들이 보인다. 다만, ≪월인천강지곡≫은 음소적 표기를 형태음소적 표기로 교정한 것이었다.
또한, ‘날, 아님, ○긔’ 등과 같이 어휘형태소들을 형태음소적으로 밝혀 표기한 경우도 있고, 또 ‘앏눈에, 몸앳, 일이시나, 을’이나 ‘안아, 담아’ 등과 같이 어휘형태소와 문법형태소를 갈라 분철한 경우도 있다. 둘받침의 경우에도 ‘넉시라, 알○’과 같이 모음 앞에서 연철한 표기도 있으나 ‘앏 뒤헤’와 같은 형태음소적 표기도 있었다. 요컨대, 어휘형태소의 경우 기본형을 고정시켜 표기하려는 형태음소적 표기가 음소적 표기에 부분적으로 뒤섞인 셈이다.
≪훈민정음≫의 맞춤법에 따른 또 하나의 독특한 표기가 있었다. 방점(傍點)이 그것인 바, “무릇 글자는 모름지기 어울려야 소리가 이루어지나니, 왼쪽에 한 점을 찍으면 거성(去聲)이요, 두 점을 찍으면 상성(上聲)이요, 점이 없으면 평성(平聲)인데, 입성(入聲)은 점을 찍는 것은 같지만 빠르고 급한 것이다.”라는 규정에 따라 ‘·옷,:실, , 괴·여, 소·다, 魯人:사’ 등과 같이 방점을 달아서 성조(聲調)를 표시하였던 것이다.
대체로 15, 16세기(특히 임진왜란 이전)의 대부분의 문헌들은 국문으로 표기된 음절에 평성·상성·거성의 성조를 방점으로 표기하였다. 그 당시의 방점표기는 역시 음소적 표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고정적 성조를 지니는 경우는 물론 동일하게 방점을 찍었으나, 가변적 성조를 지니는 경우에는 환경에 따라 성조가 바뀌는 대로 방점을 찍었던 것이다. 예컨대, ‘가·라, ·가시·면 ; 오·라, ·오나· ; 보·리·라, ·보·아’등과 ‘:앗·디, 아·, :알·면, 아·라’ 등과 같이 환경에 따라 나타나는 대로의 성조를 표기에 반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음소의 표기에 있어서나 운소의 표기에 있어서나 15, 16세기의 맞춤법은 음소적 표기가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성조 등의 운율적 요소를 표기에 반영시킨 맞춤법은 세계적으로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이 방점에 의한 성조의 표기는 ≪훈민정음≫에 따른 맞춤법과 그 이후의 맞춤법을 구분짓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 현재는 운율적 요소로서의 음장을 사전에서만 표기하고 있을 뿐이다.
≪훈민정음≫에 제시된 간략한 맞춤법규정 이후로 조선시대에는 이렇다 할 새로운 맞춤법이 제정되지 않고, 그 전통을 따르면서 부분적으로 새로운 맞춤법이 문헌상에 적용되고는 하였다. 형태소의 내부에서는 주로 음운변화와 관련하여 그에 따른 변화가 표기에 반영되기도 하였다.
‘○’은 초성으로나 종성으로도 쓰이지 않게 되었고 ‘ㆆ’은 표기상에서 사라졌으며 ‘ㅿ’도 16세기에는 종성으로는 쓰이지 않다가 그 뒤 아예 문자체계 속에서 없어지게 되었다. 초성과 종성에 모두 쓰이던 ‘’은 16세기 후반에 종성으로만 쓰이다가 ‘ㅇ’으로 대치되어 초성과 종성에서 각각 다른 음가를 나타내게 되었다.
8종성체계에서 구별되던 ‘ㄷ’과 ‘ㅅ’ 종성은 16세기에 들면서 혼동되다가 근대국어 단계를 거쳐 19세기에는 거의 ‘ㅅ’으로 표기되어 결국 ‘ㄱ ㄴ ㅂ ㅁ ㅅ ㄹ’의 7종성이 대체로 쓰이게 되었다.
15세기에는 체언(형)이나 용언어간의 종성을 모음으로 시작되는 조사나 어미와 분리시켜 적는 분철은 드물고 종성을 초성으로 옮겨 적는 연철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16세기에는 차차 분철표기가 늘어나 16세기 말엽 교정청(校正廳)에서 간행한 ≪소학언해 小學諺解≫ 등에서는 특히 체언의 경우 오히려 우세하게 되었다.
“눈물이 남긔 무드니”와 같이 체언과 조사 사이에 경계를 두어 분철하는가 하면 “집이 가난야 몸소 밭 갈아 입을 혜고”와 같이 용언어간과 어미를 분철하기도 하였으며 “먹임이 아니면 아디 몯며 아침이 아니면 아디:몯이니 나신 ○라”와 같이 어휘형태소의 내부에서까지 분철을 꾀하였다.
16세기 이후로 등장한 또 하나의 맞춤법상의 특징은 중철(重綴) 표기이다. 예컨대, ‘옷슬, 옷시, 미, ○디, 삼면’ 등과 같이 어휘형태소의 종성을 모음으로 시작되는 문법형태소와의 결합에서 초성으로 복사시키는 표기인데, 이는 연철과 분철을 동시에 표기한 결과인 것이다.
‘빗로, 면 ○틀, 덥프리오’ 등과 같이 8종성법에 의한 분철표기와 연철표기를 함께 한 중철표기도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러한 표기는 문헌에 따라서는 19세기까지도 나타난다.
또한, 18세기 후기에 등장한 표기의 하나로 격음의 종성을 이러한 중철로 표기하지 않고 재음소화(再音素化)한 ‘밋흐로, 닙흐로, 놉흔’과 같은 표기가 있다. 8종성법에 맞추되 마치 ‘ㅎ’ 계통의 조사나 어미가 있는 듯이 표기한 것이다. 그리하여 19세기에는 동일한 책에 ‘아프로, 압프로, 압흐로’와 같은 표기가 뒤섞여 나타나게도 되었다.
요컨대, 조선시대의 맞춤법은 비록 종성표기에 있어서 연철·분철·중철 및 재음소화 표기 등이 있었으나 ≪훈민정음≫에서 제시한 8종성법을 대체로 따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분철표기가 차츰 확대되면서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체언은 물론이요 용언어간들도 한자어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분철되어 표기되는 경향이 상당히 일반화되게 되었다. 이에 특징적으로 예외적인 경우가 8종성원칙을 지키면서 등장한 격음의 재음소화 표기였던 것이다.
(2) 국문연구의 정안 단계
19세기 말엽의 이러한 맞춤법의 경향 속에서 가장 심각하게 맞춤법의 통일안, 즉 국문동식법(國文同式法)을 궁리한 대표적인 학자는 주시경(周時經)이다.
맞춤법에 대한 그의 기본정신은 어휘형태소와 문법형태소 사이의 경계를 찾아 쓰는 분철표기와 그 때의 종성의 형태음소적 표기에 있었던 것인데, 19세기의 여러 표기에 대해서도 계속적인 궁리를 하였다.
주시경을 비롯하여 지석영(池錫永) 등의 몇몇 위원들로 구성된 국문연구소는 <국문연구의정안 國文硏究議定案>을 내놓게 되었는바, 이는 국문동식법과 마찬가지로 국문 즉 한글만을 대상으로 한 한글맞춤법의 성격을 지녔던 것이다.
국문연구소에서 토의된 안건은 다음과 같다. ① 국문의 연원과 자체급발음의 연혁, ② 초성 중 ㆆ ᅀ ◇ □ ○ㆄ ㅹ 8자의 부용 당부, ③ 초성의 ㄲ ㄸ ㅃ ㅆ ㅉ ○ 6자병서의 서법 일정, ④ 중성 중 ·자 폐지 {{%207}}자 창제의 당부, ⑤ 종성의 ㄷ ㅅ 2자 용법 및 ㅈ ㅊ ㅋ ㅌ ㅍ ㅎ 6자도 종성에 통용 당부, ⑥ 자모의 7음과 청탁의 구별 여하.
⑦ 사성표의 용부 및 국어의 음의 고저법, ⑧ 자모의 음독 일정, ⑨ 자순·행순의 일정, ⑩ 철자법 등 대체로 새로운 문자체계의 확립과 그 문자활용의 표기법에 관한 논의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여기서 철자법이라 함은 초·중·종성이 합하여 한 음절을 이룰 때의 표기방식을 말하는 것으로 ≪훈민정음≫의 그것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었다.
병서에 있어서는 "ㄱ ㄷ ㅂ ㅅ ㅈ의 중음서법(重音書法)을 ㄲ ㄸ ㅃ ㅆ ㅉ으로 一定고 ㅺ ㅼ ○ ○ 四字 備考로 存當."이라 의정하여 그동안 주류를 이루어왔던 이른바 된시옷표기를 각자병서가 주류가 되도록 바꾸었다.
종성에 관해서는 최세진(崔世珍)의 초성독용팔자(初聲獨用八字)를 비판하고 종성부용초성이라는 ≪훈민정음≫의 규정을 따라 ‘ㅅ ㄷ’은 물론이고 ‘ㅈ ㅊ ㅋ ㅌ ㅍ ㅎ’ 등의 초성 글자를 종성 글자로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결국 종성의 위치에서 음소적 표기를 지양하고 형태음소적 표기를 지향하는 맞춤법으로 바뀌게 한 결과가 되었다.
(3) 언문철자법 단계
국문연구소의 의정안에 이어 조선총독부는 3회에 걸쳐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 (대요)>을 제정, 개정하여 당시의 보통학교용 교과서에 채용하였다.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1912)은 “정격(政格)인 현대(現代) 경성어(京城語)를 표준(標準)으로 하되 가급적(可及的) 종래(從來) 관용(慣用)의 용법(用法)을 취(取)하야 발음(發音)대로의 서법(書法)을 취(取)함.”이라 한 것처럼 ‘·’를 폐지하는 등 ‘발음대로’ 적는 음소적 표기가 주류를 이룬다.
또한, 가급적 종래 관용의 용법을 취한다는 태도에 따라 이전의 중철·재음소화 표기 등을 대체로 이어받았으나 자음동화 등의 표기는 인정하지 않았는데, 용언어간의 경우에는 부분적으로만 형태음소적 표기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제3회개정의 <언문철자법>(1930)에서는 “終聲은 從來 使用하던 ㄱ·ㄴ·ㄹ·ㅁ·ㅂ·ㅅ··ㄼ·ㄻ·ㄺ 以外에 ㄷ·ㅌ·ㅈ·ㅊ·ㅍ·ㄲ·ㄳ·ㄵ·ㄾ·ㄿ·ㅄ을 加함.”이라 하여 보다 넓게 형태음소적 표기를 인정하게 되었다.
다만, ‘없다’의 ‘ㅄ’이라든지 ‘ㅎ(ㄶ, ㅀ)’ 등은 인정하지 않아서 ‘업다(없다), 업서서(없어서)’라든지 ‘조타(좋다), 만타(많다), 올타(옳다)’ 등과 같이 표기하도록 하였다.
이 철자법은 체언과 조사 또는 어간과 어미를 구별하여 적되 불규칙활용을 비롯한 일부 용언활용의 경우에는 음소적 표기를 허용하여 이의 구별이 필요 없는 경우가 있게 되었다.
이는 총설의 “언문철자법(諺文綴字法)은 순잡(純雜)한 조선어(朝鮮語)와 한자음(漢字音)과를 불문(不問)하고 발음(發音)대로 표기(標記)함을 원칙(原則)으로 함. 단(但) 필요(必要)에 응(應)하여 약간(若干)의 예외(例外)를 설(設)함.”이라는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
이 제3회의 개정에 참여한 심의위원에는 장지영(張志暎)·이완응(李完應)·이세정(李世楨)·권덕규(權悳奎)·정열모(鄭烈模)·최현배(崔鉉培)·김상회(金尙會)·신명균(申明均)·심의린(沈宜麟) 등 우리 나라 사람들도 들어 있다.
(4) 한글맞춤법통일안 단계
조선총독부에서 제3회개정의 <언문철자법>이 제정되어 ≪보통학교조선어독본≫ 등이 이에 따라 개정되기 시작하였는데, 이후 3년간의 작업을 거쳐 1933년에 이르러서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 朝鮮語綴字法統一案>이 나와 일반사회에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이 통일안의 구성은 총론 부분은 통일안의 기본적인 강령을 밝혔으며, 각론은 크게 7장으로 나누어져 제1장 자모(字母), 제2장 성음(聲音)에 관한 것, 제3장 문법(文法)에 관한 것, 제4장 한자어(漢字語), 제5장 준말〔略語〕, 제6장 외래어표기(外來語表記), 제7장 띄어쓰기로 되어 있고, 부록1 표준어(標準語), 부록2 문장부호(文章符號)로 되어 있다.
이 맞춤법의 대원칙은 총론에 제시되어 있는 바, “한글맞춤법(綴字法)은 표준말을 그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으로써 원칙을 삼는다.”고 하여 조선총독부의 <언문철자법>(1930)의 ‘발음대로’ 표기하되 ‘약간의 예외’를 두었던 규정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는 어휘형태소의 내부에서는 음소적 표기를 따라 ‘긔챠>기차’와 같이 역사적 표기법을 지양하려 하였고, 어휘형태소의 경계에서는 ‘값이’와 같이 대체로 그 경계를 두어 분철하면서 기본형 중심의 형태음소적 표기를 지향하려 하였다.
그러나 문법형태소의 표기는 어휘형태소의 경우에 비하여 음소적 표기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말하자면 어휘형태소의 표기를 음소적 표기에 바탕을 두고 형태음소적 표기를 가미함으로써 표의성까지 부여한 셈이다. 이러한 원칙은 ‘구개음화’(제6항) 및 ‘문법에 관한 것’(제3장)의 대부분에 나타나 있다.
형태음소적 표기를 따르지 않고 음소적 표기를 따른 문법형태소로는 ‘―이/가, ―로/으로, ―은/는, ―을/를’ 등과 같은 조사의 경우라든지 ‘―아/어/여, ―나/으나, ―ㅂ―/읍/습―’등과 같은 어미의 경우, 그리고 이른바 불규칙(변격)용언활용의 경우 등이 있다. 단어형성이나 준말의 경우에는 음소적 표기와 형태음소적 표기를 경우에 따라 적절히 조절하였다.
요컨대, <한글맞춤법통일안>은 표준어를 맞춤법의 대상으로 삼고서 그 표준어를 음소적 차원에서 그 발음대로 충실히 적으면서 한편 어법에 맞도록 형태음소적 표기를 필요한 위치에서 적절히 적용한 성격의 맞춤법이었던 것이다.
<한글맞춤법통일안>(1933)은 그 뒤 몇 차례에 걸쳐 부분적으로 수정 또는 개정되었는 바, 1937년에 내용상의 변경은 없이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에 따라 사정한 표준어로 일부 수정되었고, 1940년에는 ‘갖후>갖추’ 등의 ‘후>추’로의 개정이라든지 ‘뒷간>뒤ㅅ간, 들보>들ㅅ보’ 등의 ‘사이ㅅ’ 표기의 개정과 일부 수정이 있었다.
1946년에는 ‘변칙용언’에 대한 규정에서 ‘신고·신다·신소·신지’ 등에서의 어미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변하더라도 변한 대로 적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았고(제10항), ‘사이ㅅ’ 표기를 폐지하여 애초의 원안대로 받침으로 표기하도록 하였으며(제30항), 한자음(제48항) 및 띄어쓰기(제61항)에 단서를 덧붙이기도 하였다.
또한, 기타 띄어쓰기규정에 부분적인 폐지 및 설정이 있었다. 요컨대, 3회의 수정 내지 개정이 있었으나 그것은 지극히 부분적인 것이어서 기본적인 성격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조선어학회를 이어받은 한글학회는 이 <한글맞춤법통일안>의 한글판(1948)을 간행하였는데, 개정본의 전문을 순한글로 바꾼 것이고, 이어서 1949년에 문교부(지금의 교육부)에서 문법용어를 새로 제정함에 따라 1958년에 용어수정판을 간행하였으며, 1980년에는 <한글맞춤법>이라 하여 규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고쳐 새로 간행하였다.
(5) 한글맞춤법 단계
<한글맞춤법통일안> 및 <한글맞춤법>은 거의 그대로 사회적으로 수용되어 사전 및 교과서에까지 반영되었다. 그동안 표준어 사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79년에 문교부에서는 <표준말재사정 시안> 및 <한글맞춤법개정 시안>·<외래어표기법개정 시안> 등을 마련하였다가 1981년 학술원으로 이 작업이 이관되었다.
그 후 1985년 국어연구소가 발족하면서 다시 이 연구소로 이관되어 문교부 국어심의회의 심의를 거쳐서 1988년 1월 19일에 <표준어규정>과 함께 <한글맞춤법>이 문교부 고시 제88-1호로 관보 제10837호에 고시되었으며, 1989년 3월 1일부터는 이 새로운 맞춤법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한글맞춤법>(1988)의 내용은 제1장 총칙, 제2장 자모, 제3장 소리에 관한 것, 제4장 형태에 관한 것, 제5장 띄어쓰기, 제6장 그 밖의 것과 부록으로 문장부호이다. 이 맞춤법은 본문이 모두 57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전반적인 맞춤법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한글맞춤법통일안>과 같다.
불필요해진 조항들을 삭제하고 미비점을 보완하기도 하였으며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을 고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