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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09-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 송진우-주간조선 19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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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10-26 14:31 조회2,9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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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 송진우

- “건국 위해선 정치훈련 필요”미 군정에 협력

- 미국과 대립하는‘감정적인 반탁’안돼… 국민과 함께하는‘신중한 반탁’주장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출처: 주간조선 1923호 (2006.9)

건준 실패 예견한 뒤 민족지도자들의 총단결 외치며 한민당 창당 주도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1890~1945)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평가가 있다. 첫째는 해방 직전에 은둔하여 건국을 준비하는 과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오해는 고하가 찬탁에 가까운 주장을 했기 때문에 암살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평가는 사실을 돌아보면 정확한 평가가 아님이 판명된다.
 

고하는 해방 직후 정국의 중심이었던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주도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론인 고재욱(高在旭) 선생은 자신의 저서 ‘고하 송진우선생전’(동아일보사·1965)의 서문에서 “세계대세에 대한 정확한 분석, 역사의 진운에 대한 예리한 선견은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평가한다. 그런 그가 준비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고하는 준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나름대로의 세계관에 입각해 건국을 준비했다고 할 수 있다.  


송진우는 해방 직전에 비록 병을 핑계로 은둔했다고는 하나 국제정세의 변화 추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송진우는 “일본 제국주의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누구보다도 먼저 여기에 대비했다. 교육자이자 언론인으로서의 고하는 일제시대부터 건국을 준비했고 실력 배양에 철저했다.

그는 태평양전쟁의 추이에 대해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해방 직전에는 일제가 패망할 것을 국내에 있던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1944년 말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던 소오(小悟) 설의식(薛義植)은 카이로선언(1943년 11월)의 한국독립 약속 사실을 고하에게 전해주었다. 또한 일본 외교성 사무관 장철수가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할 즈음 고하를 찾아와 해외 사정에 대해 전해주기도 했다.

당시 지도급 인사 중 일부가 일제의 패망을 예견했으나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또한 대다수의 인사들은 해방이 된다고 하더라도 분할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고하는 해방 직전 일제가 망한다는 신념을 확실하게 견지했으며 해방 직후 여러 인사에게 “연합국이 상륙하기 전이므로 경거망동하지 말고 정세를 관망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보면 합리적인 처신이었다.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한 후에 연합국과 논의하여 건국을 한다 해도 조금도 늦을 것이 없다”는 것이 송진우의 판단이었다. 송진우는 “행정권을 이양 받는 것은 심부름을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여 일제의 치안유지 교섭을 받아들인 몽양의 경거망동을 타이르기까지 했다.

송진우는 “연합국이 들어와 일본이 완전히 물러나고 해외에 있던 선배들과 손을 잡은 후 절차를 밟아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본 총독부로부터의 행정권 이양 교섭에 단호한 태도를 보인 해방 직전의 노선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해방 당시 평양에 있던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은 평안남도의 일본인 도지사로부터 행정권 이양 제의를 받고 고하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에 그는 “개인의 자격으로 행정권을 받지 말고 민중대회를 열어 민중의 손으로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고하가 해방 전 일본의 행정권 이양을 거부하고 해방 후 국민대회를 준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고하는 “민중이 승인하지 않는 지도자는 일종의 괴뢰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연합국과 민중만이 정권을 줄 수 있으며 일본 정부나 한 개인이 정권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결국 정권인수 체제인 국민대회를 위해 ‘국민대회준비회’를 발기한 고하는 몽양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대립했으며 1945년 9월 7일 제1회 준비회를 소집했다.

또한 고하는 국내외 민족 지도자의 총집결을 주장했다. 이는 당시 아직 중국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를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그는 “3·1운동의 정신을 지지해야 한다”면서 “임시정부가 그 정신을 이어받아 법적인 정통성을 가진 정부”라고 간주했다.

따라서 고하는 “좌익세력이 미군 진주(9월 7일) 이전에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9월 6일)한 것은 경거망동”이라고 비판하면서 “임시정부의 환국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하는 “정권인수 체제를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맞추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건국은 패전국 일본인이 아닌 승전국인 연합국에서 인수 받아야 하고 임시정부를 비롯한 국내외의 민족 총역량을 집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른 것이다.

그의 국민대회 방식은 좌익의 인민대회 방식과 대비된다. 국민대회 방식만이 민족의 총의를 모으고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고하는 생각했다. 국민대회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려 했던 고하의 구상은 철저한 준비론의 산물이었으며 국제정세의 현실을 직시한 구상으로 후일 평가되었다.

지나간 역사에 가정을 하는 것이 부질없는 짓이다. ‘만약 국민대회가 열려 모든 역량이 집결되고 연합국의 승인을 얻을 수 있었다면 분단과 전쟁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는 가정을 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이로써 고하는 해방 전후에 아무런 구상과 준비 없이 은인자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또 고하는 건준의 실패를 예견했다. 건준과 인공이 연합국의 대표격인 미국으로부터 부정되었으므로 국민대회 방식이 결과적으로는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국민대회가 당시 민중의 광범한 지지를 얻지는 못했으며 각 정파들이 자파 중심적 노선에 따라 각각 건국에 대처했으므로 국민대회 소집론도 여러 대안 중의 하나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에 송진우는 민족진영의 집결체로서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을 준비했으며 9월 16일 그 결성을 주도하고 사실상의 당수인 수석총무에 취임했다. 그러나 고하는 민족진영만의 배타적 지도자는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사회주의도 포용하려 했다. 단지 원칙 면에서 양보하지 않으려는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을 뿐이다.

고하는 ‘선봉’ 1946년 1월호에 실린 ‘연두소감’에서 현단계를 사회민주주의 혁명단계로 보았으며 “토지는 소작권 설정에 의한 국유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일본제국주의가 물러간 혁명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진보적 이념은 암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공산당의 주장처럼 초기 한민당은 반동적 정당이 아니었다. 공산당이 너무 급진적이었기에 이를 제어하려 했던 고하가 ‘우파만의 지도자’인 것처럼 몰렸던 것뿐이다. 실제 그의 이념은 민족적 우파였다. 만약 고하가 살아있었다면 후일 한민당이 그렇게 우경화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1948년 정부수립 과정에 참여한 세력의 정치적 스펙트럼의 폭이 넓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1945년 12월 30일 밤, 고하는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암살당했다. 고하를 암살했던 세력은 “고하가 찬탁론자이기 때문에 암살했다”고 사후적으로 합리화하려 했다. 반대파 암살을 사후적으로 호도하려는, 사실과 다른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12월 30일은 아직 찬탁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찬탁과 반탁의 첨예한 대립 구도는 이듬해인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의 모스크바결정 지지노선 전환 이후에 등장했다. 따라서 그의 성장을 두려워하는 세력이 암살한 후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찬탁론자로 덮어씌운 것이라 볼 수 있다.

송진우는 동아일보 1945년 12월 29일자에 실린 ‘최후까지 투쟁하자’라는 글을 통해 “국제신의를 무시하고 세계사적 발전을 저해하는 조선의 탁치(託治) 운운은 단연코 배격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남녀노유(男女老幼)를 막론하고 삼천만이 일인도 빠짐없이 일대 국민운동을 전개하여 반대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의 정당한 주장을 위하여 이 강토 위에 있는 동지는 피 한 방울이 남지 않도록 결사적 용투로써 우리가 당당히 가져야 할 민족주권을 찾아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그의 입장은 찬탁은 아니었지만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배타적 반탁론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 점도 있어 후일 암살자들이 찬탁이라고 호도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임시정부가 미국과 정면적으로 대립하려 했을 때 국제정세를 의식했던 고하는 다소 다른 입장을 보였다. 임정의 ‘감정적 반탁’과 미 군정의 ‘질서 교란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라는 대립구조 속에서 고하는 중재를 하려 했다. 고하는 “국민운동을 통해 반탁을 부르짖되 과격한 반탁운동을 하여 미 군정과 충돌하는 불상사는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하의 연합국에 대한 타협적 노선은 식민지 시대 이래의 실력양성론, 독립준비론, 세계대세에 대한 분석과 연장선상에 있었다.

미군 상륙 후 고하는 정치훈련, 이른바 ‘훈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고(그러면서도 훈정을 짧게 끝내자는 토를 달았다) 이에 입각하여 군정에 적극 협력하기로 당론을 결정했으며 미 군정의 여당 격이 되었던 것이다.

후일 탁치(托治) 문제가 제기되자 암살을 지시한 세력은 그의 훈정론을 찬탁이라고 매도했다. 그러나 고하는 탁치에 찬성한 적은 한번도 없었으며 단지 감정적 반탁운동에 대해 방법론상의 이의를 제기했을 뿐이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매국적 연설을 했다”고 후일 매도 당했다. 실제로 지지 연설을 한 적은 없으며 그럴 시간도 없었다. 요인들 간의 토론은 있었으나 그렇다고 훈정론을 공개적으로 역설한 적은 없었으며 반탁의 방법을 신중하게 하자고 주장했을 뿐이다. 그의 노선은 ‘신중한 반탁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실적 상황인식 아래 보다 합리적·이성적인 반탁운동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던 고하의 노선이 감정적 민족주의자의 눈에는 용인될 수 없었던 측면이 있었다. 고하는 식민지 시대부터 암살 당할 때까지 정치적 훈련(교육)을 강조하는 준비론자(훈정론자)로 일관했다. 그는 “5년간의 신탁통치가 훈정의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며 “미 군정에 대한 정면적 반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고 말했다.

오늘의 시점에서 그의 실력배양론과 준비론은 즉시 독립을 원했던 당시의 국민감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성적 주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하 암살 후 김구(金九)의 임시정부는 미 군정에 정면으로 대립하면서 미 군정으로부터 ‘쿠데타 기도’라고 간주되었다.

또한 조선공산당 등 좌익세력이 1946년 1월 2일 모스크바의 결정에 따라 신탁통치 지지노선으로 전환한 이후 고착화된 찬·반탁의 양극화된 대립구도 속에서 고하의 신중한 입장은 더욱 더 설 땅을 잃었다.

그러나 1946년 봄 이후 미·소공동위원회(공위로 약칭)가 개최되면서 공위 참여를 둘러싸고 반탁의 분위기는 다소 진정되면서 한민당과 이승만(李承晩)의 신중한 반탁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종국적으로는 탁치 문제를 포함한 모든 정치적 문제를 경직되지 않고 융통성 있게 바라봤던 한민당과 이승만의 노선이 승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하의 이성론은 현실적 대안이 되었고 김구의 감성론은 이상론으로 남았다. 미국을 의식한 현실주의와 분단을 극복하려는 이상주의는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대립했으며 현재까지도 현대사 해석의 논쟁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송진우 그는 누구인가

- 일제 때부터 건국 준비 주장한 민족주의자
- 국제 정세 파악 위해 단파방송 도청… 언론사 사장으로 실력배양·자강운동 전파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는 교육자이자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다. 일제시대에는 준비론을 견지한 독립운동가였으며 해방 직후에는 정당의 대표였다. 그는 한국 보수정당의 비조(鼻祖)요 태두(泰斗)였고, 정치적 식견과 수완이 출중한 지도자였다.

그는 조선왕조의 국권이 위태로웠던 1890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기삼연(奇參衍), 김직부(金直夫)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담양학교를 세웠던 부친 송훈 선생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맺어질 때 15세 소년이었던 고하에게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1907년 창평(昌平)의 영학숙(英學塾)에 들어가 고광준(高光駿), 김성수(金性洙) 등과 영어 등 신학문을 배우다가 평생의 벗 김성수와 함께 가족 몰래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0년 4월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입학하였으나, 그 해 8월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충격을 받고 20세 청년의 몸으로 귀국했다. 그는 귀국 후 기삼연을 찾았으나 스승은 이미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1908년 일본군에 의해 총살된 뒤였다. 부친 송훈은 흥분하는 고하를 실력배양론 전술의 하나인 기회론의 입장에서 진정시켰다고 한다.

고하는 1911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법과에 입학한 후 실력배양론, 자강운동론의 사상적 틀을 형성했다. 1915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고하는 애국 계몽운동적 교육과 언론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1918년 만 28세 되던 해 고하는 인촌 김성수에 이어 중앙학교 제10대 교장에 취임한다. 그는 중앙학교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의 기회를 엿보자”는 기회론을 전파했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1년 반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 10월 30일 출감한 고하는 담양에서 학교설립 모금운동을 벌이다가 같은 해 겨울 다시 경찰에 붙잡혀 담양경찰서 유치장에서 지내게 된다. 고하는 유치장 안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할 때 항상 국제정세 흐름 속에서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자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하는 1921년 9월 15일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했고, 1945년 사망할 때까지 동아일보의 사장·고문·주필 등을 역임했다. 고하는 언론인과 교육자로서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 확충에 기여했지만 무장투쟁적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그는 민족의 혼을 지키면서 건국을 준비하는 준비론자의 면모를 보였다. 따라서 식민지시대 송진우의 사상은 교육중심주의, 계몽주의, 신중론으로 집약될 수 있다.

송진우는 1940년 동아일보가 일제에 의해 폐간되자 일제에 대한 일체의 협력을 거부했다. 그러던 중 단파방송 사건이 일어났다. 송진우는 1940년 8월 동아일보가 폐간된 이후에도 과거 동아일보에 근무했던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만났다. 홍익범(洪翼範)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홍익범은 1924년에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31년 컬럼비아대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1935년 동아일보에 정치부 기자로 입사하여 폐간될 때까지 근무했다. 어느 날 홍익범은 송진우를 찾아가 “그 동안 전세(戰勢)를 알 수 있었던 것은 외국인 선교사 덕택이었는데, 그들이 잡혀가고 귀국하여 전세를 알 길이 없다”고 말했다. 송진우는 “어떻게 해서든지 현재의 전세를 알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봤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홍익범은 송남헌(宋南憲)을 찾아갔다. 송남헌은 교편을 잡고 있을 때 홍익범의 아들을 가르친 적이 있어서 서로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홍익범의 얘기를 들은 송남헌은 경성방송국 편성과 PD로 근무하고 있는 양제현을 떠올렸다. 송남헌은 경성방송국의 어린이 방송프로와 가정물의 작가로 문학활동을 하고 있어 방송국에 자주 출입하고 있었으며, 아동문학 동호인인 양제현과는 교분이 두터웠다.

양제현은 처음에는 난색을 표시하면서 주저했으나 비밀리에 단파방송 내용을 알려주는 데는 동의했다. 그래서 송남헌과 홍익범을 통해 단파방송 내용이 당시의 지도자급 인사들에게 전해지게 됐다. 송진우, 김병로(金炳魯), 이인(李仁), 허헌(許憲) 등이 주로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단파방송에서 들은 얘기가 세상에 나돌면서 고하는 다시 일본 경찰로부터 요주의 인물이 된다. 1942년 말에서 1943년 봄에 이르는 동안 ‘경성방송국의 단파방송 도청으로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다’고 하여 일본 경찰은 대대적인 검거를 시작한다. 이것이 경성방송국의 단파방송 도청사건이다.

경성방송 단파방송을 통해 해외 소식을 접할 수 있었던 고하는 몽양이 “건준에 동참하라”는 제의와 관련, “몽양, 자중하시오. 우리에게는 충칭에 임시정부가 있고 미국에는 구미위원부가 있소”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하는 1945년 8월 10일 총독부로부터 행정권 이양교섭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8·15 광복 후 여운형 등이 주동이 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맞서 우익세력을 규합, 한국민주당을 결성하고 수석총무가 되었다. 미 군정에 적극 협력하면서 뒤이어 환국한 이승만 및 임시정부 지도자들과 함께 정부수립에 힘쓰는 한편 속간된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한국의 신탁통치안이 전해지자, 신탁통치 반대를 강력히 주장하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견해를 달리하다가 한현우에게 12월 30일 자택에서 암살되었다. 고하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부인 유차 여사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어 큰 형으로부터 송영수를 입양했고, 장자부 김현수와의 사이에 손자 송상현(宋相現)을 얻어 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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