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07-권이혁, "송진우(宋鎭禹) 선생", 온고지신(溫故知新) - 우강(又岡)에세이 제Ⅱ집,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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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10-26 14:31 조회3,04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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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宋鎭禹) 선생"
권이혁
1944년 어느 봄날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 선생을 원서동(苑西洞)자택으로 찾아가 뵌 적이 있었다. 경성제대 의학부 2학년 때였다. 고하선생은 다른 독립운동가와는 달리 '자립'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계시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어 한 번은 꼭 찾아 뵈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용기를 낸 것이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주신 말씀은 잊혀지지 않는다. 듣던 대로 민족정기나 문맹퇴치·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등에 관하여 덕담을 주신 후 꼭 두 가지는 지켜야 한다고 언명하셨다. 첫째는 이왕에 의학부에서 공부하는 것이니 착실하게 학업을 계속하라는 점, 둘째는 절대로 입을 조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 때가 고하선생을 뵈운 단 한 번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 때 주신 선생의 덕담과 충고는 오늘날에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 후 8·15 광복을 맞이하여 고하선생께서 뛰시는 모습에 몹시 감동을 받았다. 일반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대학사회에서도 좌·우 격돌은 심화하고 있었는데 고하 선생은 우리들의 갈 길을 명시해 주시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가! 광복된 해 12월 30일 새벽 6시 15분 한현우, 유근배 등의 흉탄으로 원서동 자택에서 서거하셨다.
나는 평소 남재 김상협(南齋 金相浹)선생을 좋아했고 교분을 맺어 오고 있었다. 내가 서울의대 학장시절에 남재선생은 고려대학교 총장이셨는데 주 1회 정도는 혜화동병원에 오셔서 원무를 지도하고 계셨다. 그 때 나는 가끔 병원으로 찾아 뵙고 간담을 나누곤 했다. 한마디로 김총장은 인격자였다. 경복고 4수생(四修生)으로 일본 야마구치 고교(山口高校)를 거쳐 도쿄대학(東京大學)법학부를 졸업하신 분인데 한 번도 자기 자랑하시는 것을 들어 본 일이 없었다. 내가 서울대총장시절에도 남재선생은 고려대총장이셨는데 1982년 국무총리로 발탁되셨다.
1994년 초겨울 어느 날 고려대 명예총장이시던 남재선생이 "고하 송진우선생 기념회를 창설하려고 하는데 참여 해주면 좋겠다"고 하기에 좋다고 대답했다. 고하선생의 장손인 서울법대 송상현(宋相現)교수가 남재선생의 서랑이어서 고하선생에 대한 남재선생의 관심은 남다른 것이었다. 이리하여 1994년 12월 30일 정오에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고하선생 기념사업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이사로는 기세훈(奇世勳) 인촌기념회장, 김병관(金炳琯) 동아일보 회장, 김창식(金昶植) 전교통부장관, 김학준(金學俊) 단국대이사장, 김상협(金相浹) 전 국무총리, 송상현 서울법대교수 그리고 내가, 감사로는 홍일식(洪一植) 고대총장, 김유후(金有厚) 변호사가 선임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물론 남재선생의 지명에 따른 것이다. 1995년 2월 21일 남재선생이 서거함에 따라 김상홍(金相鴻) 삼양사 회장이 뒤를 이었다. 이렇게 하여 오늘날까지 나는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데 별로 도움이 되는 일도 하지 못하고 있고 다만 고하선생 탄신일인 5월 8일 탄신 기념추모회를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는 고하선생 묘 앞에서 거행하고 여기서 추모문을 올리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도 매년 200명 가까운 저명인사들이 모여 고하선생을 추모! 하는 광경은 성스럽기만 하다.
기념사업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으니까 자연히 고하선생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되며 선생께서 얼마나 훌륭하신 분인가를 알게 된 것이 나에게는 대단히 값진 일이다. 선생께서는 1890년 생이시며 어린 시절 한학(漢學)을 10년간 수학하신 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창평(昌平)의 영학숙(英學熟)에 입학하여 이 곳에서 평생 동지이신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을 만나셨다. 1908년(19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 및 중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하셨다. 1915년(26세) 명치대학(明治大學)법과로 전과하고 이 대학을 졸업하셨다. 일본 유학기간 중 유학생 친목회의 총무를 맡으시고 잡지 '학지광(學之光)' 편집인을 역임하셨다. 귀국 후 27세에 중앙학교 학감(學監)을 맡으신 후 교장에 취임하셨다.
1918년(29세) 중앙학교를 중심으로 학생회를 조직하고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인촌선생, 현상윤(玄相允)선생 등과 조국독립운동을 계획하여 마침내 3·1 독립운동을 일으키셨다. 3·1 운동관계로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시고 1921년 (32세)에는 동아일보 제 3대사장(주식회사 동아일보사의 초대사장)에 취임하셨다.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과 민립대학(民立대學) 설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시고, 재외동포위문회와 시국강연회를 주최하셨다.
1924년(35세) 사설(社說)에 항의하는 친일파 박춘금(朴春琴)등의 권총테러를 당하셨고 이해에 동아일보 사장직을 사임하셨다. 1925년 하와이 제 1회 범태평양 민족회의에 신흥우(申興雨), 유억겸(兪億兼), 서재필(徐載弼), 김활란(金活蘭)씨 등과 함께 참석하셨다. 그 곳에서 이승만(李承晩)박사를 처음 만나 망명제의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할 것임을 천명하셨다. 귀국 후 '世界의 大勢와 朝鮮의 將來'라는 명 논설을 12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게재하셨다. 다음해 국제농민본부에서 조선농민에게 보낸 3·1절 기념사를 게재하였다 하여 옥고를 치르고 동아일보는 무기정간 당했다. 1927년(38세) 동아일보 제 6대 사장에 다시 취임하셨다. 1930년(41세) 동아일보 창간 10주년 기념호에 미국 '네이션지' 주필의 축사를 게재하였다 하여 무기정간 당했다.
1931년(42세) 이충무공유적보전운동(李忠武公遺蹟保存運動)을 시작하여 국민의 성금으로 아산에 현충사(顯忠祠)를 짓는 한편 행주산성(幸州山城)에 권율(權慄)장군의 기공사(紀功祠)를 중수(重修)하셨다. 이해부터 여름방학마다 '보나로드 운동'이라는 국민계몽 운동을 시작하셨다. 한편으로는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발발하자 이것이 일본의 한중이간(韓中離間)을 목적으로 한 간계(奸計)임을 즉각 간파하시고 폭행당한 국내화교를 위문하는 동시에 서범석(徐範錫)기자를 만주현장에 파견하여 비밀리에 국제연맹 조사단에 진실을 알렸다. 또한 만주사변 때는 설의식(薛義植), 서범석 기자를 특파하고 피난 동포구호운동을 신속하게 개시하였다. 1936년(47세) 손기정(孫基楨)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 무기정간, 잡지 '신동아' 및 '신가정' 폐간을 당하고 동아일보 사장직을 강제사임 당하셨다. 1943년(54세) 동아일보사 청산위원회 해제 후 주식회사 동본사(東本社)를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하셨다.
1945년(56세) 해방직전 4차례에 걸쳐 총독부로부터 정권인수교섭을 받았으나 거절하셨다. 해방 후 건준(建準)의 협조요청을 거절하고 정당시기상조론과 연합군 환영의 필요성을 내세워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김창숙(金昌淑)씨를 고문으로 서상일(徐相日)·장택상(張澤相)·김준연(金俊淵)씨 등을 임원으로 하여 국민대회 준비위(國民大會準備委)를 결성하고 그 위원장에 선임되셨다. 그러나 정치정세의 변화로 인하여 우익진영의 사당합동에 따라 한국 민주당이 결성되고 선생께서는 수석총무로 추대되셨고 이어 중간(重刊)된 동아일보의 제 8대 사장으로 취임하셨다.
고하선생은 해방정국에서 가장 중요한 이 두 개의 조직을 이끌고 환국지사후원회(還國志士後援會) 결성, 상해 임시정부 법통(法統)지지, 이승만 박사와 국민총동원법 논의 등 나라세우기에 전력하다가 1945년 12월 30일 새벽 흉탄에 쓰러지셨다.
이상은 고하 송진우선생이 걸으신 길을 요점만 살펴본 것인데 55년 동안에 아무도 따를 수 없는 참으로 놀라운 일을 해 내신 것이다. 나는 추모사를 쓸 때마다 선생의 정신을 떠올려 본다. 나는 고하정신을 신중성(愼重性)·예견성(豫見性)·자립성(自立性)·자주성(自主性)으로 집약한다. 선생님의 신중성은 생전에 취하셨던 언행이 잘 말해 주고 있다. 앞을 내다보는 혜안(慧眼)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이 우러러 보고 있다. 자력으로 자립하고 모든 경우에 자주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 오늘날에는 더욱더 진가를 나타내고 있다. 고하정신에 대한 연구가 대학사회나 연구기관에서 성행하고 있는 사실이 결코 우연하지 않다는 것은 주지되어 있는 바이다. 고하선생의 어록(語錄)을 읽어 보면 참으로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느끼고 또 느끼게 된다. 한마디로 힘이 있어야 독립이 가능하다는 것이 선생의 일관된 주장이셨다.
※ 출처: 온고지신(溫故知新)-우강(又岡)에세이 제Ⅱ집, 241-247면, 신원문화사, 2007.7